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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죽거림

사형제의 고도전략

흉악한 범죄가 떠들석해질때마다, 기다렸다는 듯이 재등장하는 사형제 존속론은 이제 더이상 새로울 것이 없다.

얼마전 사형제가 합헌으로 겨우겨우 존속되는 과정을 거친 곳에서, 그 "겨우겨우" 존속되었다는 사실에 불안감을 느끼는 찬성론자들의 심리적 저항은 이해가능하다.

물론 인정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포털 사이트 중심의 뉴스읽기가 점점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지금,

온라인 전문 미디어는 물론이고 주류 미디어 역시,
그리고 더 나아가 객관적 뉴스 생산자라고 "믿어주길 바라는" 기간 통신사인 연합통신까지

인터넷에서 손가락 빨리 돌리는 사람들의 입맛을 맞추기 위한 기사를 뿜어내고 있는 요즘.

오늘 연합뉴스의

"사형 가능성 있어" 라는 제목의 기사는 섬뜩하기만 하다.

단순하게 "가능성 있어" 라는 말을 객관화된 "가능성 존재"라는 의미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죽었으면 좋겠을 사람에 대해 죽일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있다는 수사법을 사용한 언어 선택 때문에 섬뜩하다는 것이다.

조금 다르게 생각해보면 "죽일 수도 있어" "죽어도 된다고 판단할 수 있어" "죽여야 된다고 생각할 수 있어" 라는 레토릭이 내포되는 것이다.

수사학은 맥락적이기 때문이다.

범죄자 사진 공개에 열을 올리고 있는 조선일보는 이번에도 열심히 "더이상은 가려'주지' 않겠다" 는 기사를 날리면서

인권에 대한 법치 우선의 수사학을 뿜어주고 있다.

일반에서의 사형제에 대한 논쟁은 사실 상당부분 순수한 동기에서 시작된다. 인간의 가치, 도덕, 안전한 삶 등 말이다.

하지만, 이런 유사 권력 기관에서 뿜어내는 사형제 논쟁은 고도의 억압기제들에 대한 정교화와 수사적 우위선점의 목적을 갖고 있다.

낚이질 않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