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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죽거림

Binary code 뛰어넘기. 다른 반대를 위하여.

이진법 코드화에 대한 이야기를 자꾸 하게된다.

데카르트 이후의 소위 말하는 서구 Dualism 은 한국에서 찬란하다 못해 충격적으로 꽃을 피우면서 그 힘을 발휘한다. 이 듀얼리즘 속에서 한국 사회는 양 편향의 파행을 겪게 된다.

대표적인 것이 소위 말하는 반독재 이후의 민주주의 "성취" 라는 민주주의의 "있다/없다" 의 설정에서 야기된 사회 변혁의 "급정거" 현상을 들 수 있을 것이고..

지난번에 구시렁댄, 독도에 대한 사랑이 "있다/없다" 의 설정속에서 등장하는 듀얼리즘적 민족주의가 있다.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고.. 그 이후로도 지속된 민주주의 세력에 대한 이진법적 코드화는 특히나 가장 강력한 한국 사회 변화의 잠재적 방해자로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이 이진법에 0.5 를 들이밀으면 아주 손쉽게 분열주의자가 되어왔고, 그건 그 다음에나 할 일인 다음 단계의 이진법으로 버려진다.

물론 그 다음단계가 왔다고 주장을 해도, 여전히 이 아이들은 0.5로 남는다.

왜냐하면 여전히 "민주화" 의 이진법의 의미는 강력하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권의 탄생이 그러했고, 탄핵정국이 그러했고, 이명박의 등장이 그러했고, 쇠고기가 그러했고, 노무현 조문정국이 그러했다.

독재시대의 기나긴 터널, 그리고 그것을 이어받은 신자유주의적 개발론자들의 득세.. 그것에 대한 다른 이진수인 "전통적" 민주주의 세력, 그리고 제도적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인지되는 세력.

그렇게 이진법적인 코드로 남아진 지금

한국이란 공간에서, 창조적이고 지속적인 진보를 기대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일이 아니다.

변증법은 받아들이되, 변증법의 하나의 삼각형. 즉, 정-반-합 의 일단계 삼각형만을 신봉하며 극심한 듀얼리즘을 남겨놓는 이 "민주세력"들은

그저 권력의 "있다/없다" 의 이진법의 충실한 동반자일 뿐이다.

듀얼리즘은 그 둘간의 치열한 싸움을 통한 새로운 양과 질의 변화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 둘간의 갈등을 하나의 일상의 의식 (Ritual) 으로 고착시켜, 사고를 설정, 고정하는 역할을 한다.

이속에서 우리 주변은 늘 "덜 나쁜" 세력들에게,

"더 나쁜" 세력을 "없게" 만드는 힘을 부여하는 것에 수많은 에너지와 정신을 소모하고 있는 것이다.

있다. 없다. 그리고. 다른게 있고. 또 다른게 있다.


MB OUT 이 또 종착점이라고 주장하는 그들이 정말 지겹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