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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Binary code 뛰어넘기. 다른 반대를 위하여. 이진법 코드화에 대한 이야기를 자꾸 하게된다. 데카르트 이후의 소위 말하는 서구 Dualism 은 한국에서 찬란하다 못해 충격적으로 꽃을 피우면서 그 힘을 발휘한다. 이 듀얼리즘 속에서 한국 사회는 양 편향의 파행을 겪게 된다. 대표적인 것이 소위 말하는 반독재 이후의 민주주의 "성취" 라는 민주주의의 "있다/없다" 의 설정에서 야기된 사회 변혁의 "급정거" 현상을 들 수 있을 것이고.. 지난번에 구시렁댄, 독도에 대한 사랑이 "있다/없다" 의 설정속에서 등장하는 듀얼리즘적 민족주의가 있다.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고.. 그 이후로도 지속된 민주주의 세력에 대한 이진법적 코드화는 특히나 가장 강력한 한국 사회 변화의 잠재적 방해자로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이 이진법에 0.5 를 들이밀으면 아주 손쉽게 분열주.. 더보기
쫌 나아짐의 한계 조금씩 나아지면 좋다. 나아지니까 좋다. 그러니까 조금씩이라도 나아지는 쪽으로 가자. 그렇게 불붙었던 2002년의 개혁깃발이 이명박이라는 참 되도 않는 깡패보스 같은 무식한 불도져에 밀리고 있다. 그래서. 슬픈가? 많은 사람들이 슬퍼하는 듯 하다. 하지만, 그 슬픔은 그 조금 나아짐에 대한 차악의 선택을 취했던 스스로에 대한 슬픔일 것이라는게 합당한 말이리라. 금전에 관한 문제가 터졌다. 그리고 마치 그 문제가 조금 더 나아짐을 취한 사람들에게 굉장한 타격처럼 두르러지고 있는 시점이다. 표면적으론 그렇다. 하지만, 그것은 조금 더 나아짐 이란 담론이 갖고 있는 한계일 수 밖에 없다. 기본적으로 사회 구조가 (크게는 전 세계적인 체제가) 작동하는 원리가 존재하는 공간 속에서 그 원리 자체를 인정하는 가운데..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