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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가.게

자본주의에 대한 시더운 논쟁.

동네가게에 대해 종종 글을 쓰면서 하고자 하는 생각은, 모두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다름을 어떻게 유지할 수 있느냐에 대한 고민이다. 인류는 자본의 시대를 겪으면서 획일화 동질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Globalization 이라는 거대한 유사하기의 프로젝트를 맞이하고 있다. 그 동질화의 토대인 자본주의. 그 곳에서 다름의 추구는 과연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일면 무관해보이는 한 인류학 책 이야기로 생각의 두뇌를 괴롭혀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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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트의 발전과 함께 출판의 대량생산이 가능해지면서 모국어 (Vernacular) 의 이용이 확산된다는 시대맥락적인 개념에서 시작한 이 이론은, 사람들이 같은 내용을 멀리서도 동일 시간대에 읽을 수 있는 동시성 (Simultaneity) 을 통한 동질화 (Homogenization) 가 근대 민족주의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 (매우 폭력적인 단순화지만..)

이러한 내용을 기반으로하는 Benedict Anderson 의 Imagined Communities 는 한국에도 꽤 오래전에 번역되어 출간이 되어있고, 인류학을 비롯하여 인문사회과학 전반에서 민족주의, 자본주의, 매스미디어의 상관관계에 관련된 이론으로 다양하게 이용, 적용되고 있다.

(물론 이 부분에 대해서도 한번은 이죽거려줘야겠다. 어떤 현상의 한 부분과 어떤 이론의 한 부분을 편리하게 차용해서, 모두가 -굳이 증명을 하지 않아도- 예측할 수 있는 인과관계를 설명하려고하는 현재의 학문 풍토에서, 이 상상의 공동체라는 개념역시 폭력적으로 단순화되어서 아무데나 다 끼워맞춰지는 만능 이론이 되어가는 경향이 있다. 미디어의 역할에 대한 강조 때문인지, 미디어 전지전능론에 빠진 수많은 "신방 학자" (이게 도대체 왜 학문인지 모르겠지만) 들이 편리하게 이용하곤 하는 이론인 것이다.) 

사실 앤더슨의 이론에는 두가지의 포인트가 있는데, 몰역사적인 미디어 학자들은 그 중 하나의 포인트에만 집중한다. 즉 프린트라는 매스미디어의 발달에만 집중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 더욱 중요한 포인트는 자본주의라는 것이다. 대량생산이라는 단순한 생산시스템의 변화가 아니라 생산수단의 독점을 통한 대형화 대량화라는 정통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의 자본주의 이해가 기본이 되고 있는 이론이라는 점이다. 앤더슨은 그러한 자본주의의 생산관계의 변화를 가장 선도적으로 주도한 것이 바로 프린트 자본주의라고 주장을 한다. 그리고 그러한 출판의 대량생산이 문화, 이데올로기의 동질화를 가져옴으로써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바로 그 근대의 민족주의가 유포될 수 있는 물적토대로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던 중 얼마전 얼핏 시덥지 않아보이는 앤더슨의 이론에 대한 비판을 담은 글을 읽게 되었다.
과연 생산관계의 근본적 변화로 인한 대량생산, 그리고 동질화 과정이냐에 대한 비판이다. 즉 생산관계, 자본과 임금노동의 관계는 자본주의를 다른 생산체제와 구별짓는 가장 결정적인 것이라는 마르크스주의적 전제를 고려했을때 당시 출판업의 생산관계가 정말로 자본가주의의 형태를 띠고 있었는가에 대한 질문인 것이다.

그리고 앤더슨의 예에 대한 비판을 한다.
벨기에 안트워프에서 24개의 프레스를 구비하고 100여명의 노동자를 고용한 16세가의 출판 자본가 Christopher Plantin 이란 사람의 사업에 대한 예를 구체적으로 거론한다. 즉 앤더슨은 이 사람의 사업이 프린트 자본주의의 자본-임금노동 생산관계, 생산수단의 독점, 대량생산을 보여주기 때문에 대표적인 사례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 글을 비판한 David McInerney 라는 호주의 대학원생 (몇년전 대학원생이니 지금 어딘가 있겠지만 뭐 거기까지 알아볼 필요까지야..)은 앤더슨의 그 주장이 문헌에 대한 잘못된 이해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즉 24개의 프레스에 100여명의 노동자라는 근대적 개념의 출판공장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생산수단을 독점한 것은 사실이지만, 여러곳에 산재한 공방에서 한 공방이 2-3 대의 프레스와 5-6명의 노동자를 (그것도 반 이상은 월별로 계약하는 Journey Men) 고용하여 운영하는 일종의 봉건체제와 자본주의의 과도기적 단계의 모습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량생산에 대한것도 사실, 당시 최고의 베스트셀러였던 루터파 성경이 4000부를 넘지 않았고 디드로의 백과사전도 그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이정도의 양을 "동질화"의 조건으로 삼는 것은 좀 무리가 있다는 주장이다.

마치 숫자 놀음같이 들리는 이 논쟁은 얼핏 시덥지 않아보이나, 사실 중요한 자본주의의 원리를 담고 있다. 주장의 사실여부를 떠나서 획일화 동질화의 원인을 어디서 찾느냐는 것이다. 앤더슨은 프린트 자본주의라는 조금은 애매한 개념 (즉 생산관계를 자본주의의 결정적 단서로 보는듯 하면서도, 그저 대량생산 시스템을 자본주의의 단서로도 생각하는 듯한 - 이 후자의 자본주의 개념은 소위 말하는 아담스미스류의 고전경제학이 기반하는 개념이다) 을 이용하여 프린트가 이념적 문화적 동질화의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주장을 한다. 하지만, 당시의 출판업은 자본주의적이지도 않았고 (새로운 기계가 발명되긴 했지만) 따라서 그렇게 대단히 대량생산도 아니었고, 결국 동질화의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얘기하기에도 무리가 있다는 것이다. 결국 자본주의라는 생산관계가 프린트자본주의라는 애매한 개념보다 더욱 명쾌하게 이후 근대 국가 형성과 문화-이념적 동질화 과정을 설명하는 근본 토대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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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가게에 대해 호기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대량생산 대량배급 대량소비 획일화 동질화에 대한 생각을 다시금 하고있던 차에, 별무관하게 읽던 논문에서 저러한 주장을 보면서 다시 근원적 고민으로 되돌아가게 됐다.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동질성을 창출해냈다.

(주의! 속류마르크스주의적 경제결정론이라고 이죽거릴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 논의 안에는 다양한 층위의 사회와 기구 appratus 의 역동적인 움직임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각각의 다름을 추구하는 "동네가게"는... 어떻게 해야 가능할까... - 무모한 단순화도, 무모한 결정론도 가까이 하진 말기.. 하지만. 유토피아적 낙관주의도 가까이 하진 말기. 그렇다고 손안대고 코풀 생각은 하지도 말기. 

생산관계는 변해야 한다. - 무모한 결정론으로 받아들이진 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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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쁜가게 찾아다니는 일이 되지 않게 하기위한 두뇌구타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