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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날저런날

취향의 상실. 피맛골. 개발.


외국에 산다는 것이 유독 지쳐오는때가 여러번 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기억하고 있는 것이 사라져갈때. 마지막 인사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다는 것이다.

아직 다행스럽게도 사람에게서 그런 일을 겪은 적은 없다. 늘 걱정이지만, 주변 사람들이 모두 건강해줘서 그런일이없다. 고맙다.

하지만, 공간과의 관계에서는 그런일은 빈번히 일어난다. 몇해전 없어진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아쉬워하던 그 공간 피맛골은 대표적인 곳이다.

그러고는 피맛골의 사라짐에 대해 잊고 있었나보다. 작년 한국 방문에서도 익숙하게 그 공간에서 사람들을 만났던 기억을 해보면.. 난 어떤 감흥을 갖고 있지 않았던 듯 하다. 그저 자연스럽게 나의 취향을 즐겼나보다.

그리고 어제는 다큐멘터리 3일이라는 프로그램에 담긴 피맛골의 마지막 모습을 보았다. 프로그램은 지난 여름에 제대로된 작별인사를 나누지 못한 나의 무심함이 울컥 원망스러워지게 만들기 충분하리만치 그 공간의 속속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 화면에 나온 어르신들이 갖고 있는 추억과 기억에 비하면 나의 기억은 일천하기 짝이 없겠지만, 내게도 여러 기억이 존재 하는 공간

데모가 끝나면 소주한잔 걸치고 취한척 구호외치고 노래부르던 허름한 술집.. 막창구이..갈치조림...빈대떡에 동동주.. 그리고 김빠진 맥주와 눅눅해진 마른안주..
건너편 길의 요란한 네온사인과 음악소리로 가득한 공간보다는 좀 더 친한 사람들을 불러낼 수 있는 공간이 바로 내게는 피맛골이었는데..

라는 생각을 하면서 나의 취향이 사라지고, 사라지도록 강요되고, 박탈되는 모습을 TV 로만 바라보게 되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취향과 계급의 관계에 대한 부르디외의 논의를 굳이 이해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현대 사회 우리의 취향은
때론 다수결로 결정되고,
더욱 절망적으로
자본의 희망대로 결정되어버린다.

자본의 취향대로 멋지고 깨끗한 식당들이 반듯한 건물에, 반듯하게 정리된 공간에 자리잡히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현대의 미덕이고 발전의 모습이고
그리하여 우리의 취향으로 강요되는 것이다.

광고, 이미지의 홍수 속에서, 우리는 취향의 선택지를 빼앗긴채 취향의 강요를 받아들여야 하고, 그 속에서 차선으로 차악으로 폭을 좁혀가며 획일화된 "입맛"에 적응해간다.

미국은 요즘 대통령 부인부터 나서서 "slow food" 운동이니 "local food" 운동이니 하는 취향의 다양화에 다시 눈을 돌리고 있다.

하지만 한국은 여전히 미국을 아직 다 따라잡지 못해서 안달인지, 효율적인 획일화를 통한 개발만이 남아있는 듯하다.
우리는 취향의 다수결을 통한 귀결이라는 폭력 조차도 용인되지 않은채 (이도 다분히 폭력적이나, 한국은..)
오직 자본의 취향대로 돌아가는 광폭한 폭력의 시대를 벌써 몇십년째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