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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가.게

이주자. 구역 나누기. 다름의 공존

세계 곳곳에서 이주하는 인구가 증가하고 있고 대도시들은 그 인구집단들이 새로운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그 이주와 정착의 역사가 깊은 미국에서 그 인구집단들은 꽤나 또렷한 경계선을 갖고 지리적으로 분리된다. 이러한 지역분할은 미국의 segregation (분리) 라는 대표적 차별로 해석이 되곤 하지만, 문화적으로는 다양성 공존의 궁극적 형태라는 생각도 해본다.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동네" 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그 동네의 지배적 민족이 누군지를 파악하는 것은 기본이 되곤 한다. 지역이 민족적으로 구별되어지고 있는 모습이 전통적 의미에서 "섞여살아야 조화로운 것" 이라는 개념에는 반하는 것이지만, 사실 그 섞여살기가 내포하고 있는 지배계급의 문화지배를 이해해 보았을때, 그렇게 분리되어있는 것이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여기서 민족은 우리나라의 국가주의적인 nation 민족이 아니라, ethnic 이다. 즉 아시리아 라는 나라는 현재 없지만 아시리안은 있듯이 말이다. 한국의 단일민족 드립이 그동안 기본적 단어의 이해조차도 방해해왔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인종적으로 민족적으로 지리분할이 되어있는 미국의 대도시들이 대표적 차별의 양상이라 비판받는 이유는 기득권을 갖고 있는 층이 새로운 인구유입을 거부-회피하여 못들어오게 하거나 다른 곳으로 나가는 분리의 일차적 원인때문이다. 그렇다면 섞여서 살면 그러한 문제는 해결되는가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겠다. 


       다른건 다를때 조화롭다. 2009. Toronto.


섞여서 산다는 것의 전제는 물론 조화이다. 불안정한 공존이 아닌 조화를 의미한다. 물론 그동안 주류사회가 시혜적으로 얘기해 오던 섞여살기 역시 불안정한 공존을 전제하지는 않는다. 조화로움을 이야기 한다. 하지만 그 조화로움의 전제가 또 하나 들어가는데, 그것은 대표적으로 문화적 동화 assimilation 이다. 이 문화적 동화는 단순히 언어를 습득하고 생활 양식을 체득하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지배적인 토대의 흐름에 조응하는 것, 즉 자본주의적 질서에의 철저한 순응을 요구하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model minority (모범소수자) 논리를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즉 미국이라는 새로운 이주처에서도 열심히 노력만하면 주류사회에 들어와서 잘 섞여 살 수 있으니까 노력하시오. 라는 논리인 것이다.
즉 섞여살려면 자기들 수준에 따라와서 맞추라는 말이다. 즉 이 섞여살기에는 섞여살기와 동시에 segregation 이 동시에 내포되어있는 것이다. 조화로울 수준이 되지 못하면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민족과 인종의 지리적 분할은 미국자본주의, white male 우위 사회의 대표적인 문제점이다. 

하지만 이 문제에서 문제의 해답인 다양성의 공존을 찾을 수 도 있다.

백인들의 기대와 종용에 부합하여 열심히 노력해 좋은 학교에 보내고 열심히 돈을 모은 이주자들은 끝내 백인들이 자신들을 피해 숨어들었던 교외지역에 들어가 기필코 "조화로운 섞여살기"에 성공했다. 하지만 그들이 또 비우고 남은 자리에는 지속적으로 새로운 이주자들이 새로운 구역을 만들어 삶을 영위해간다. 

그렇게 나갈사람은 다 나가고 버틸사람들은 버텨가면서 이제 미국의 대도시들은 인종적 민족적 구역들이 안정적으로 자리잡히면서 자신들의 공간을 만들어가고 있다. 그리고 도시의 전체 속에서 각각의 부분이되어 도시의 색을 만들어가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렇게 각각의 공간의 다름은 도시라는 곳은 "다를 수 있는 곳" "달라야 하는 곳" "다름이 존재해야 하는 곳" 이라는 생각을 만들어주는데 큰 역할을 해주고, 그 속에서 이주자들은 한 도시의 또다른 주인으로 자리잡힐 수 있는 것이다. 즉 우리 도시를 구성하는 한 부분이 되는 것이다. 다른 것이 다르게 자리잡고 있을때 결국 우리의 일부가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역할은 "섞여살기"에서는 기대할 수가 없다. 섞여살기는 그 전체 맥락속의 충실한 부속품이 될 따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섞여살 수 있는 것과 살지 못하는 것의 이원론적인 분리만 존재할 뿐이다.  

물론 전체적인 경제구조를 살펴보았을때, 대다수 이주자들의 동네들은 부자동네를 위한 용역의 인구로 채워져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각각의 이주자 동네는 때로는 부자들이 좀 있어보이는 척 하면서 먹을 줄 안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찾는 많은 민족음식점들로 채워져있다. 그리고 배웠다는 티를 내기위해서라도 페루의 소품 하나, 인도의 향신료 하나라도 더 구하기 위해 이주자의 구역을 찾는다. 이 속에서 이주자의 공간들은 자연스럽게 도시의 구성공간이 되고, 사람들도 존재감을 얻는다. (물론 다름의 상품화는 또 하나의 문제를 낳지만, 이 글에서는 일단 패스)

지구적 인구이동의 시대에서 우리는 이주자의 문제에 대해 원론적인 유토피아만을 요구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즉 모두가 정말 제대로 섞여살며 조화롭게 살아가는 상황을 그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제대로 섞여살았을 사람들이었으면 애시당초 인구이동 자체가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자본주의, 그리고 자본의 세계화가 만들어낸 이동이었고, 분리였기 때문이다. 궁극적 공존의 유토피아를 꿈꾸는 것을 나무랄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딛고있는 구조와 체제에 대한 적극적 저항일 경우는 더더욱이 그렇다. 

하지만, 궁극적 공존의 유토피아를 꿈꾸는 것과 동시에, 필연적인 분리가 가져다 주는 다름의 공존, 그 다름의 공존이 만들어내는지배에 대한 제어, 새로운 다름의 창조.
그 힘에 대해서도 좀 더 관심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항상 한국사회를 보며, 이주노동자와 결혼이주자들을 보면서 아직도 melting pot 과 multiculturalism 수준의 인식론으로 그들을 주류사회에 동화시키려는 시도를 발견하게된다. 이주의 역사가 일천한 나라가 겪는 시행착오라고 하겠지만서도, 최소한 그러한 동화정책이 얼마나 폭력적이며 차별적인 것이가에 대해서는 좀 더 깊이.. (그것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도 역시 깊~이) 생각해보았으면 하는 바램에서 끄적여보았다. 

그리고 시카고의 분리된 공동체들에 대해서도.. 게으름이 걷혀지는 순간 한두개씩 올려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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