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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가.게

시골과 문화. 자본의 흐름.

Darcy 님께서 서울에서 별로 떨어지지 않은 당진에 계시면서 시골의 문화적 빈곤을 푸념하셨기에.. ㅎㅎ 그냥 몇자 끄적여본다. 

사실 이런 문제에 대하여 내가 이야기하기에는 경험이 부족한 면이 있을 수도 있다. 물론 한국에서 말이다. 서울에서 나고 자라고, 군에 들어간 이후에야 서울을 아주 살짝 벗어나 경기도에서 살았지만, 학교도 직장도 다 서울에서 다녔던 내게 "한국에서 지방살기" 가 정녕 무엇인지 안다고 얘기하면 "ㅉㅉ 서울쉑히" 라는 말을 들어먹기 딱 좋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의 미국 생활은 철저하게 시골의 삶이었고, 뉴욕과 같은 도시와 시골의 문화적 격차는 한국과는 또다른 차원의 문제를 갖고 있는 나라이다보니 꽤나 경험이 있다고 해도 무방하리라 싶다. (미국과 한국의 문화격차가 다른 차원이라고 한 이유는 우선 이동거리를 둘 수 있다. 굳이 설명이 없어도, 한국에서의 문화 중심으로의 이동거리와 미국에서의 그것이 얼마나 다른지는 대충짐작 하시리라.)

버팔로에 살던 몇년은 나름대로 뉴욕주 버팔로라는 허울좋은 바운더리에 의지하여 시골의 적막함을 달랠 수 있었다. 물론 단지 뉴욕주라는 이유만을 부여하기에는 야속한 측면이 많기도 했다. 나이아가라라는 유명한 관광지가 있고, 한때 최대 공업도시였던 과거의 영화가 남겨놓은 음울한 기억의 문화상품들도 많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캐나다의 문화중심이라 할 수 있는 토론토와의 멀지 않은 거리도 꽤나 매력적인 것이었다.

이렇게 버팔로에서 나름괜찮았던 삶에 대해서도, 진~~~짜 지루해.. 라는 말을 되뇌여오던 내가 오클라호마로 가는 악수를 둔 것은 당분간 공부에 몰입할 것이라는 얼토당토않는 다짐이 작용한 것이었고, 또 뭐 그리 나쁠까 하는 미국 남부에 대한 무지 때문이었기도 했다.

어쩌면 내가 가장 싫어했던 것은 시골의 무료함이 아니라 남부의 카우보이기질. (백인을 가장 싫어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를 만들어주곤 하는)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오클라호마에는 카우보이 뮤지엄이 있다. 시설은 정말 대단하다. 

그렇게 간 오클라호마는, 나름대로 큰 대학도 있고 어쨌든 그 주의 중심인지라 각종 미술관 박물관 등이 자리하고 있었다. 석유자본이 자본의 대종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보니, 기부도 활발한 듯 했고, 그래서인지 학교 미술관에도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화가들의 작품들이 여럿 놓여있었다.

하지만 전시는 그냥 전시일 따름이었다. 마치 여기 사람들도 요정도는 즐겨줘야지 라고 생각한 선심성으로 시설물들이 들어서 있는 그런 느낌말이다.

그 어떤 새로운 박물관과 미술관, 공연이 들어온다고 해도 연일 TV 에서는 뉴욕과 LA 와 시카고만 등장한다. 그곳의 음식들과 그곳의 생활방식과 그곳의 스타일의 시각신호가 사람들의 기억속에 자립잡는다.  그러한 상대적 격차와 지리적 고립감이 가져다주는 문화적 박탈감은 몇몇의 시설물로 극복 할 수는 없는 문제일 것이다.

하지만, 뉴욕의 그 모든 것을 모든 곳에 다 옮겨놓을 수도 없는 일이니, 결국 해결될 수 없는 것. 아니면 감수해야 하는 것이 되는 걸까. 생각해본다. 소위말하는 숙명론 말이다.
고흐의 그림이 전세계 모든 시골에 까지 두루 퍼져있으려면 무덤에서 다시 파내, 귀도 다시 붙여주고, 정신과 치료도 다시 시켜줘서 그림그리기를 독려해도 쉽지 않듯이, 모두가 물리적으로 같은 문화적 환경을 갖게 될 수는 없다는 논리 말이다.  

현재 시장자본주의에서 자본의 흐름을 지역적으로 균등하게 한다는 것은 불가능 할 듯 싶다. 
단지, 문화자본이라는 무형적 자본의 구조, 그 흐름에 대한 제어는 가능한 실천양식이 되지 않을까. 
즉, 우리는 문화적으로 "좋아보이는 것" 으로 상징화된 문화자본 (Cultural Capital) 의 불평등한 분배구조위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인식하고 바꿔가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좋아보이는 것은 서울에 있고 뉴욕에 있다. 그것은 이 자본의 사회속에서 승자 (Winner)로 분류되는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생산해낸 상징들이다. 좋아보이는 것은 사는 요량이 좋아보이는 사람들이 하는 것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것은 서구의 근대화-제국화를 통한 문화적 세계지배로부터 비롯되어, 각 지역 내부간의 문화지배양상까지 이르게 된 자본주의 문화의 상징자본인 것이다. 그 상징에 대한 소비를 중단하고, 지금 우리가 숨쉬며 살아가고 형성한 문화를 좋은 것으로 인식해 가는 과정. 그 과정 속에 자본흐름을 제어할 수 있는 힘이 있다. 

하지만 이렇게만 이야기하는 것은, 
지금 당장 미술관 하나 박물관 하나 제대로된 도서관 하나 없는 시골의 사람들에게 "좋아보이는게 좋아보이는게 아니라고 생각하면 돼" 라는 교회 목사나 할 수 있는 뻥만 날린채 "내가 이쪽으론 쫌 진보적이지" 라고 자위행위를 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예전에 당을 밥먹듯이 바꾸면서 돌아다녔던 경상남도지사였던 사람은 뉴욕의 노란 택시도
                      좋아보인다며 경남의 모든 택시를 노랗게 바꾸셨다. 게다가 좀 탁한 노란색으로 Customizing
                      까지 하셨더랬다. 



늘 이론과 실천은 우선이 없듯, 병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각 지역에서의 지역 문화 활성화 운동, 자본 (상징 자본 말고 진짜 돈) 의 지역적 균형 분배,  지역에서의 지식 운동의 활성화 등 지역의 사람들이 실질적으로 자신들의 문화자본을 소유할 수 있는 활동 역시 병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이 말은 잘못됐다. 궁극적으로 문화자본 역시 철폐의 대상인 한 말이다)

미국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지역의 문화적 아우라 형성을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동네의 가게들이 생겨나고, 작은 축제들 속에서 소통이 확장되고, 인터넷과 같은 테크놀러지를 이용하여 문화의 중심과 소통을 한다. 

그와 더불어 여전히 "좋아보이는 것이 꼭 다는 아니야" 라는 이데올로기를 확산시키는 것. 그것도 참 중요할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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