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런날저런날

비인에 관한 잡설.

오랜만의, 너무도 오랜만의 한국방문을 마치고 돌아왔다. 아이를 가족들에게 보여주는게 주 목적이었던 터라 오랜 사람들도 많이 만나지 못하고.. 새로운 사람들도 만나지 못했다. (Darcy 님께 죄송죄송을 외치며..) 

이제 돌아와서 몇가지 중요한 일을 시작함과 동시에 마무리해야 한다. 

학생이라는 꼬리표를 떼는 작업과 함께 학생의 꼬리표를 떼는 기념으로 글자들이 모여진 생산물을 만들어 볼까 하는 생각에 들뜨는 만큼 아득하리만치 복잡해진다. 

물론 뭐니뭐니해도 자라나는 새싹에 물이라도 담뿍 줄 수 있을 자본이 필요한 터라 머리가 더 복잡하기도 하다. 

그런 머리를 식혀볼겸 이곳의 제목에 대한 정돈을 시도한다. 

Be-in. 이건 이 블로그를 시작함과 함께 처음 사용한 제목? 필명? 이다. 

영어에서 Sit-in 이라는 일종의 단어가 있는데 이는 아마도 "연좌농성" 정도로 해석될 수 있을듯 하다. 사전적으로야 그렇지만, 모든 언어에는 맥락이라는게 담겨있는 법. 

미국에서 5-60년대 일련의 "sit-ins" 가 있었다. 흑인 민권운동이 한창이던 시절 남부의 도시들에서 인종차별 철폐를 요구하는 다양한 시위에서 이 sit-in 의 방법이 사용되었기 때문에, sit-in 이라는 단어는 60년대 민권운동의 상징처럼 의미화되었다. 

여기에 human be-in 이라는 개념도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민권운동과 유럽을 시작으로 휩쓸던 신좌파의 운동에 영향을 받은 미국의 젊은 세대들이 반문화운동을 한참 벌여나가던 그 핵심의 장소인 샌프란시스코에서 인간해방, 인간중심의 문화를 주창하며 만들어낸 일종의 신조어인 것이다. 

물론 그 어떤 사람들보다도 미국의 히피 운동에 대해서 부정적이지만 (극도의 인간중심이 되다 보니 극도의 자기 안위에 빠져버린 마스터베이션적인 운동이라는 이유로) 그 의미에 대해 백배 공감하는 바 be-in 이라는 이름을 가져다 쓰게 되었다. 

그리고 사진에 낙관을 만드려고 하다보니, 웬지 한자가 좀 괜찮아 보인다는 초딩스러운 마인드로 만들어낸 것이 非-因 이다. 한문학적인 지식이 전혀 없는 관계로, 저것이 문자그대로 "인과하지 아니하다" 라는 의미일지 아닐지는 모른다. 뭐 꼭 아니어도 상관은 없으니, 괘념치 않지만 말이다. 

여하튼 인과하지 아니하다라는 의미를 담고 싶었다. 근대 합리적 이성이라는 것이 인과관계속에서 정립되며, 그 광폭한 "진리"의 폭력을 행사한지 500여년이 지난 이 시점에서, 여전히 "인과"되는 것에 대한 거부는 힘겨운 싸움이기 때문에, 좀 더 절실한 마음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원인이 있음에 결과가 있다는 단선성은 서구지배를 합리화 시켰고, 그 속에서 세계는 명쾌한 이원론의 세계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좀체로 빠져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러한 이원론 -개발과 저개발의- 이 세계에서 유래없이 명쾌해온 한국사회에서 성장기를 보낸 내게 또한 더욱 절실한 거부가 아니었을까 싶다. 

비인. 
이번 한국에서 유일하게 머리를 텅 비워낼 수 있는 시간이었던 1박 2일간의 군산-부안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 비인이라는 곳을 보았다. 예전에 부안 농활다니던 시절에도 보면서 이름이 외국스럽네 (아마도 예전에 오스트리아 수도 빈을 저렇게 표기했기 때문이리라) 라고 생각했던 그곳. 비인을 지났다. 

       비오던 곰소. 


지금은 새만큼의 엽기적인 뚝방에 인접한 그곳. 온갖 트럭과 공사장비들이 물을 메울 준비를 하고 있는 그곳에 비인이라는 곳이 있다. 

아무것도 인과되지 않은듯 서있던 내소사와 개암사의 고즈넉함 건너에 잘살기위해서라는 인과의 폭력이 거대한 구조물로 드러나있던 곳. 

비인. 

할일은 여전히 참 많다. 



'이런날저런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욕망의 상징자본. 아울렛 몰  (6) 2011.05.29
학생과 입장료  (2) 2011.05.18
공짜는 머리가 벗겨지게 추워도 좋다.  (4) 2010.12.06
저렴함과 무료사이  (2) 2010.10.13
도시에 정착하기.  (11) 2010.1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