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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죽거림

세계화. 신자유주의. 2PM. 그리고 조국?

그냥 장난스럽게 빈정거리면서 쓰기에는 우리 시대의 참 많은 모습을 집약하는 듯 해서 몇자 더 끄적여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세계화된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세상은 국가라는 개념을 법적인 테두리라는 형식적인 수위로 조정해 놓았다.

국가는 여전히 국민들에게 시민권을 설정하는 역할을 하고는 있지만, 이미 자본에 의해 결정되는 가상의 시민권은 그 개념을 뛰어넘었다.

자본의 필요에 따라 사람들은 국가라는 개념을 뛰어넘어 시장의 수급에 조응하며 살아가게 된 것이다.

능력이 뛰어난 사람, 혹은 계급적으로 특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이미 자신의 물리적 공간을 자유롭게 설정하면서 자신의 물질적 자본과 상징적 자본을 축적해오고 있다.

그리고 국가라는 법적 기구로 부터 한 국가의 시민권을 부여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무한 경쟁과 소수 독점의 신자유주의 체제로 부터 외면 당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을 구하기 위해 또 역시 물리적 공간을 뛰어넘어 하루하루를 겨우겨우 살아가곤 한다. 우리가 흔히 보는 전 지구적인 현상인 불법 이민이라는 딱지를 붙여버리는 이주 노동자의 현실이 그렇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본축적을 위한 공간 이동, 다른 시장으로의 편입은 이미 모두에게 암묵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상황이 되었고, 조기유학과 같이 주변에서도 보기 쉬운 사례들을 통해 우리는 이미 많은 부분 익숙해져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족주의 혹은 국가주의는 또다른 형태의 세계화의 결과물이라는 점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국가는 이미 "좋은 비즈니스 환경" 조성을 최대의 목표로 하는 이른바 에이젼트의 역할을 하면서, 스스로도 하나의 글로벌 플레이어가 되고자 하는 정치 엘리트의 수단으로 남아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자본, 국가, 그리고 그것들을 뒷받침하는 각종 기구들, 특히 미디어는 소위 말하는 민족주의적 감성과 국가주의를 코드화 하여, 유통시키고

온전한 내용은 남아있지 않은 껍데기로서의 코드화된 민족주의과 국가주의는 미디어 테크놀러지의 발전과 세계화의 흐름속에서 공고하게 사람들과 공동체에 전파되어간다.

이 상황 속에서 민족 혹은 국가에 대한 강조는 세계화된 자본을 지탱시켜주는 지역에서의 충성심 강화라는, 사실 마케팅 기제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지 않다.

실제로 민족주의 혹은 국가주의 담론이 추구해야 할 실천적 행위들을 담당해야 할 국가 라는 단위가 이미 도구적 역할 혹은 그 스스로가 가장 자본화된 행위자의 역할에 집중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감상만이 남아있는 국가주의는 상당히 쉽게 개별의 인간을 한 덩어리로 수렴시켜 효과적으로 조리할 수 있는 재료가 되는 것이다.

2pm 인가 하는 가수를 둘러싸고 몇몇 언론들이 유포하고 있는 "조롱하고 경멸하던 곳에 와서 돈이나 벌어갈 생각으로 왔으면 당장 꺼져"라는 말 속에는 이러한 우리 시대의 복잡한듯 하지만 아주 단순한 자본의 논리가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그리고 한 가수의 문제보다 더 심각하게, 많은 이주노동자 문제에서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현실도 바로 이러한 구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개인적인 수준, 감상적인 수준.. 이런 것들에 비난 비판은 언제든지 가능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현실들이 과연 사람들의 생각과 시선을 어떻게 고정시켜가고 있는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더욱더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미 어쩌면, 집단적인 저항으로 바꿀 수 있는 시점이 지나버리지 않았나 하는 절망이 점점 짙어져 가고 있는 시점에서, 개개의 성찰을 요구하는 것이 참 무책임한 탈근대의 모습을 하고 있는 듯 해 맘에 들지는 않지만,

일상의 소통속에서 지켜질 수 있는 최소한의 것을 실천형태로 제시하는 것이라 자위해봐야겠다.

참. 어려운 시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