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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음

버젼론

어렸을 적 쥬피터라고 불리는 모짜르트의 교향곡 41번의 LP 판이 있었고, 익숙히 수십번을 반복해서 들었다. 그리고 어느날, 라디오에서 NHK 교향악단이 연주하는 쥬피터를 들었고, 나는 순전히 내 귀에 익숙하지 않다는 이유로 NHK 교향악단을 그 이후로 여러해동안 수준 이하의 악단이라고 생각했었다. 그 곡을 누가 지휘를 했는지도 모르고, 내가 수십번 들은 연주와 NHK 의 연주간의 차이에 대한 음악적 이해는 완전히 무시하고 말이다. 고전음악은 그렇게 수많은 사람의 해석으로 다른 버젼이 되어 다른 곡이 되어왔다. 


가요에서도 팝에서도 리메이크라는 이름으로 때론 트리뷰트라는 이름으로 그리고 때론 표절이라는 이름으로 지나간 음악의 새로운 버젼이 나오곤 한다. 대체로 리메이크에 대해 흥미를 못느끼는 바는, 내귀에 익숙한 곡들에 대한 변형에 대한 소극적 거부감이 큰 부분을 차지한다. 하지만, 몇몇 샘플링을 통한 리메이크의 천편일률화, 소몰아 가는 목소리로 맨 똑같은 꺾기송 만들기는 소극적 거부를 넘어서 혐오를 보내기도 한다. 한국의 가요에서는 특히 타겟이 되곤 하는 유재하 노래 (유재하의 가창력을 훌륭하다고 말할 수 없지만, 그 노래는 그 불안한 음정과 음량만의 맛이 있음에도..) 를 소몰이 송으로 만드는 것은 특히나 소음이라 치부한다. 


요즘 각종 오디션 프로그램은 새로운 해석으로 지난 노래 재 창조라는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었고, 나름 다른 쟝르로 바뀌어진 그 노래들이 새로운 느낌으로 현실과 맥락과 조응하며 신선해진다. 기존의 곡이 다양한 해석으로 새롭게 다가오는 것은 새로운 다양성으로 관대하게 받아들여도 되겠다 싶다. 물론 그 이면을 봤을때 시장이 만들어낸 상품진열대의 협소화와 획일화의 결과물일 거란 생각에 씁쓸한 입맛을 다시게 되지만 말이다. 


오디션 시장에서의 새로운 해석의 또 다른 획일화를 낳기도 하는 듯 하다. 발랄하게 펑키한 락앤롤 사운드가 어느덧 2년의 오디션 열풍속에 지루해질 만큼 많이 들리고, 여성 장년 무리들의 주부가요열창 망령은 여전하다. 여전히 R&B 의 꺾기는 적절한 꺾기의 지점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채 오로지 꺾기에만 열중한채 썰렁함을 주기도 한다. 그렇게 급조된 재해석은 협소한 편곡시장의 획일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역할만 하기도 한다. 


그럴때면 생각나는 Fiona Apple 의 Across the universe 가 있다. 한국에서 유재하 리메이크를 싫어하듯, 외국에서 비틀즈 리메이크를 참 싫어하는 편인데 (물론 그 양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도 한 몫을 할 것이다) 이 곡 만큼은 원곡에 대한 선호를 살짝 누르고 나갈 만큼의 느낌충만 감성충만 새로움 충만 간지 작살인 리메이크이다. 이정도라면 기꺼이 내 마음의 저작권을 내놓을 용의가 있다. 




 



그리고 재즈를 듣는다. 재즈는 고전음악 만큼이나 정해진 곡에 대한 여럿의 다른 해석을 중심으로 쟝르가 발전해왔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유명한 재즈 곡들은 지난 수십년동안 전세계의 수많은 뮤지션들의 새로운 해석을 재창조되어왔다. 오늘 여기에 꼭 달고 싶었던 이 음악 "My Funny Valentine" 역시 예외가 아니다. 다행이 고전음악과는 달리 한 지휘자 혹은 한 연주자의 음악에 귀가 닳지 않아서, (그 만큼 늦게 듣기 시작해서) 여러 연주자의 곡을 동시다발 적으로 듣다보니, 정확한 나의 호오를 파악할 수 있었고, 그래서 이 곡을 그만큼 소중하게 좋아하기도 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나의 Funny Valentine 을 소개한다. Stan Getz 와 J.J. Johns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