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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죽거림

외도중.

SNS 라는 것을 좀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페북은 지인과의 소통용으로 트위터는 우물밖인지 안인지 모를 다른 세상을 들여다 보려고 한다. 여러줄의 전공 리스트에 New Communication Technologies 가 적혀있는 이유도 조금은 있다. 논문 양산을 요구하는 "학술시장" 에서 최소한의 상업 행위를 하려면 관련된 논문 주제 찾는 작업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페북이든 트위터든 그 테크놀러지를 처음 맞이할때의 생각과 자세는 그 안의 사용자, 나의 맥락적 변화에 따라 지속적으로 진화해왔다. 미국친구들과의 정보 나눔이 주를 이루던 페북은 이제 한국의 한국 친구들과의 난장이 되었고, 다른 세상을 보고자 했던 트위터는, 그 다른 세상에서 나오는 무수한 말들의 피로감때문에 비슷한 류의 모르는 사람들이 모여진 공간이 되고 있다. SNS 에서 '수렴' 이라는 말이 떠오르며, 다양성의 혼재와 다양성의 배타적 공존 이라는 애매모호한 말의 차이에 관심을 보이게 된다. 

아무래도 정치얘기가 많다. 정치를 전공으로 삼은바 있는 내 주변의 많은 사람들때문인지, 정치 자체가 워낙에 과잉인 나라에 국적을 두고 있어서 그런지, 페북의 지인 소통 역시 정치얘기가 참 많다. 트위터는 말 할 나위도 없지만 말이다.

몇년전 SNS 에는 MB 에 대한 절망과 한탄이 주를 이루고, 상당히 넓은 범위의 이데올로기가 하나로 진영을 형성했다. 내 친구들 사이에도,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도. 그리고 그 MB 가 막판 힘을 잃고 부정의 도를 넘어서면서 진영은 다분화 된다. 여전히 반 MB 라는 급부를 통해 정치적 이문을 남기고자 하는 사람들과 정치과정의 전반에서 필연적일 수 밖에 없었던 MB 출현의 맥락을 비판하는 사람들. 그리고 과잉된 정치를 넘어서 경제적 평등과 인권 감수성의 구축을 원하는 사람들.

그렇게 다분화 되는 듯한 모습을 갖고 있는 공간이지만, 사실 또 어찌보면 그것이 Micro blog 라고 불리는 것 마냥, 더 micro 하게 분절되어 소통이 차단되는 듯한 모습도 보인다. 그리고는 열광적으로 받아들여진 테크놀러지에 대한 절망적 수사가 난무하며 통제와 제한, 혹은 용도폐기를 외치는 모습까지 보게된다. 그래서 결국 보면 이전의 모든 미디어와 크게 다르지 않은 생애를 겪어나간다고도 볼 수 있다. 열광적 도입과 폭발적 사회현상, 끊임없는 비판 (그 속의 다양한 마녀사냥 -모든 죄를 미디어에 뒤집어 씌우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명을 지속적으로 연장하며 하나의 미디어로 자리잡혀 이용되고 있는 '지난' 미디어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궤적을 갖고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기술결정론도 특정 프레임에서는 이해가 되는 바이고, 또한 "문화적 준비 cultural preparation" 이라는 개념 (문화적으로 준비된 상태에서 기술은 확산될 수 있었다는 역사사회학적 관점) 으로 테크놀러지의 확산을 받아들이는 것도 늘 설명이 되며, 하이데거가 얘기했듯 테크놀러지의 본질은 그 사용의 목적에서 결정된다는 것도 또한 맞다.

모든 결정론이 그렇듯 기술결정론 역시 숭배와 마녀라는 두가지 극단을 남긴다. 전체적 맥락에서 기술결정론은 "과잉" 담론이지만, 현상들을 볼때 사실 참 강력한 설명의 도구가 된다. 즉, 역사-사회적으로 바라볼때 기술결정론은 오류 투성이지만, 실제 사회에서 벌어지는 숭배와 마녀사냥의 모습들을 보면 여전히 설명할 수 있는 많은 이해점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문화적 준비라는 개념은 (개인적으로 가장 동의하는) 중세시대 정확한 시간개념이 필요했던 수도사들에게서 기계식 시계가 처음 확산되듯, 직지심경이 그 역사적 최초성의 특권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던 사회문화적 상황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기술과 문화를 설명하는 강력한 담론이 된다. 그리고 이는 SNS 를 둘러싸고도 유용한 설명의 도구가 된다. 문화적인 필요와 문화적으로 준비되어있는 상황. 페북과 트위터에 대한 구구절절한 설명이 없이도, 그것들이 갖고 있는 분절된 (탈)근대 사회의 개인들의 조합을 보면 어느정도 이해가 되리라 본다.

같은 맥락에서 하이데거의 테크놀러지론 (굳이 말을 붙이자면) 역시 기술과 사회 그리고 좀 더 개인화된 기술을 이해하는 좋은 기반이 된다. 내가 꽃이라고 부를때 꽃이된다는 김춘수의 시 마냥, 테크놀러지는 다른 테크놀러지와의 그리고 사회와의 더 나아가 개인과의 관계 속에서 그 테크놀러지의 본질적 성격이 형성된다는 것은, 'micro' 와 '2.0' 으로 표상되는 현재의 웹테크놀러지의 연관망을 참 잘 설명해준다.

우리는 테크놀러지를 둘러싸고 열광적 흥분과 묵시록적 절망을 동시에 본다. 그리고 또 권력의 존재와 더불어, 그 테크놀러지를 이용과 제한의 수단으로 삼고 그에 저항하는 모습을 본다. 그리고 부지불식간 그 테크놀러지와 그를 둘러싼 문화, 그를 둘러싼 제도와 정치를 "원래있던 것 마냥" 받아들이고 살아간다. 

결국 그래서 다시 시선은 인간에게로 돌려진다.

"그래서, 소통은 늘었나? 소통은 어떻게 변했나? 소통은 무엇을 낳고 있나?"


Technology and Communic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