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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목

외계도시. 세트장. "미국적 공간". Bartlesville.


그런 도시들이 있다. 얼핏 이름을 들어보고, 누가 다녀와봤다고 하고, 유명한 무언가가 있다고 한다. 한 일년에 한번정도 들어본다. 그리고 기억에서 지우다가 또 한번 들어본다. 안가도 그만이다.

Bartlesville 은 오클라호마 북동쪽 끝에 자리잡고 있고, Tulsa 에서도 4-50분 정도를 나가야 있는, 지도상으로 보면 말 그대로 "벌판 한가운데의 시골" 로 인식 될 수 있는 도시이다. 이 지독한 중남부 벌판에 지쳐버린 나에게 그 곳을 찾아가보고자 하는 의욕이 생길리 만무하다.

가끔 그곳의 영상이 TV 에서 휘리릭 지나가면, 맨날 똑같은 Frank Lloyd Wright 의 건축물이 보여진다.
1. 저거밖에 없나부다...2. 도대체 왜 저기까지 가서 그냥반이 건물을 지었을까...3. 웬 벌판한가운데 고층빌딩...4. 여튼 저 20세기 전반부의 그거 말곤 새로운게 없단 말이잖아..볼거 없겠군..
이런 참 불공평한 생각을 그것도 매우 짧게 하고는 관심을 꺼버렸던 그 곳에 다녀왔다.


      서부영화세트장을 모던한 빌딩 앞에 지어놓은 것 같다는 느낌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털사를 빠져나와 북쪽으로 올라가다보면, 유전이 한두개 보이기 시작한 후, 둥글둥글 텔레토비 동산과 윈도우 XP 동산이 번갈아 등장하면서 이곳에 오래 산 사람에게 아무런 자극을 주지 않는 나른한 풍경을 제공한다. 그렇게 가다보면 여느 미국의 소도시와 비슷한 월마트, JC Penny 등이 있는 타운이 나타난다. 에효..이러면.. 우리동네랑 똑같은 풍경에.. 다운타운이라 할 수 있는 한 50미터짜리 쪼금 큰 건물 집합 한개 나온다. 골동품가게 한두개 있고..그런. (대부분의 미국 마을에 대해 난 참 인정머리없다)

다운타운을 향해 들어가는데, 엥 소리 나는 의아함으로 눈에 들어오는 일련의 고층빌딩들이 보인다. 그냥 느낌이 뭐랄까 충청도를 지나 산을 넘어 경북 봉화군에 들어갔는데, 20층 넘는 고층빌딩 몇개가 쭈르륵 놓여있는 그런 느낌정도보다 더 강하다. 대도시 중앙부 일부와 학교, 병원을 제외하고는 웬만해서는 3층넘는 건물이 거의 없는 이 거대한 땅덩어리 나라이기에, 이 벌판위의 고층빌딩들은 좀 외계스러웠다.


대기업이 있으니까 고층빌딩이 이해가 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뭣하로 높이 올릴까 하는 마음은 여전하다. 넓디넓게 펼쳐진 벌판에서 말이다. 이카루스의 꿈? 남성성의 상징? 뭐 이런말로 고층건물을 기호적으로 설명하지만, 땅값비싸서.. 보다 설득력 있는게 어딨을까.. 근데. 여긴 좀 그렇지 않단 말이다.


이곳은 세계에서 5손가락 안에 드는 큰 석유 회사인 Conoco Phillips 가 처음 시작된 곳이고, 지금은 본사가 휴스턴으로 이전했지만, 여전히 자신들의 기업타운처럼 4개의 고층빌딩을 소유하고 있는 곳이었다. 이곳은 1900년대 초반 남부 유전개발 붐의 가장 큰 수혜를 입은 곳이었고, 그래서 수많은 떼부자들이 돈을 주체하지 못했던 곳이기도 하다.

그 주체할 수 없는 돈의 흔적이 Frank Lloyd Wright 의 Price Tower 이다. 건축물, 디자인에 관심은 많지만 조예는 전혀 없는 관계로, 그 한땀한땀 구석까지 모두, 심지어는 놓여있는 가구와 조명까지 모두 디자인을 통해서 만들어진 그 건물에 대해 섬뜩한 느낌마저든다. 어릴적 600백만불의 사나이 같은 드라마를 보면 드는 느낌.. 마르게 파란 하늘, 각진 자동차들, 각진 건물들, 각진 가구들... (나풀거리는 바지).. 의 그 느낌이 그 색 그대로 눈앞에 놓여있다.

이곳엔 아주 작은 전시관이 있는데 예전에 이곳에서 사용하던, 그의 디자인으로 된 가구들이 전시되어있다. 그리고 1층에는 그 맥을 이어가는 작가들의 설계도와 그와 소통했던 작가들의 고상한 기억들 (크리스마스 카드에 설계도와 같은 그림으로 장식을 해서 보낸다든가)이 전시되어있다.
 

청동으로 외관을 둘러싸..세월의 흐름만큼의 청록빛으로 낡은 현대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날카롭게, 직각을 벗어난 각도로 시선을 흩트린다.


로비를 제외한 모든 것이 카피라잇으로 걸려있다고 사진촬영을 금지하는 불친절함과, 조금만 밖에 서있더라고 구워질거 같은 뜨거움을 제외하면, 나름 이 기이한 공간 배치 (지도상으로 이해불가능한 공간 형성) 를 구경하는 것의 재미가 쏠쏠한 곳이었다.

..
한국에 살다보면, 석유자본의 거대함을 느끼기가 쉽지 않다. 정유하는 업체 몇개가 대규모를 자랑하고 있지만, 그것을 파내고, 정유하고, 팔기까지 하면 그 자본의 규모가 얼마나 커지는지는 세계 기업 규모 순위를 보면 알 수 있다. 미국의 석유회사들은 우리가 매일매일 듣는 그 거대 어마어마한 기업들보다 윗순위에 자리잡고 있다. 

그 거대한 자본이 한번.. 풍~하고 쏟아져오면, 나른하고 닿을데 없는 벌판도 고층빌딩 몇개로 채워지고, 그곳의 가진사람들은 자신들의 외계도시를, 자신들의 세트장을 배경삼아 뉴욕의 문화소비자도 되고, 휴스턴의 자본가도 되고, 서던캘리포니아의 한량도 되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돌아나와 털사쪽으로 내려오는 길. 

다운타운을 둘러싼 타운의 외곽은. 

가난한다. 

진저리쳐지게 우울한 모습으로 가난함을 풍기는. 남부. 시골의. 빈곤함. 빈곤한 생활, 빈곤한 경제. 빈곤한 풍경. 빈곤한 꿈. 

                                           폐허같은 붉은 벽돌의 건물과 초록색 생명의 보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