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죽거림

복지보다 급진적인, 반핵만큼 급진적인

사실 가장 급진적인건, '원래 그래' 라는 것에 대한 '그렇지 않을껄' 이라는 문제제기일 것이다. 영국에 "급진적 인류학" 이라는 모임과 저널 있다. 그런데 굳이 그 말을 붙이지 않더라도, 인류학에서 급진적인 움직임은 참 많다. 그것은 아마도 '원래 그래' 라는 말에 대한 끊임없는 문제제기를 통한 원래 그런 것의 근원을 찾아가기 때문이다. 

예컨데,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인간은 원래 남보다 더 많이 갖고 싶어해라는 말에 대한 원래를 부정하는 작업은 자본주의에 대한 가장 급진적인 기획이 될 수 있다. 흔히 더 이전 상태로 회귀하는 것을 보수라고 얘기할 수 있지만, 그것은 연대기적인 문제가 아니라 현재 우리의 생각을 지배하고 있는 지배적 구조가 '임시적' 인 것라는 점, 그래서 그 임시적인 것에 대한 대응에 기원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작업은 급진적이다. 

또 하나의 급진성은, 정치사상에서도 많이 논의되는 '자연상태'에 대한 부분인데, 인류학의 탐구는 자연상태와의 끊임없는 비교이며, 이 자연상태에 대한 고민은 문명이 왜곡시켜온 인류에 대한 본질적 고민을 던져줌으로써 급진성을 띠게 된다. 

요즘은 선거도 있고해서, 복지라는 말을 흔하게 듣는다. 그리고 후쿠시마의 1년의 충격때문에 핵에 대해서도 많이 생각한다. 이 두가지에서 급진성은 무엇일까 고민해본다.

복지라는 것은, 기 형성된 구조에서 벌어진 모순에 대한 치료라는 후처방 제도에 가깝다. 그렇기 때문에 복지는 급진적일 수 없다. 이 제도는 여전히 따라가는 제도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노인복지를 얘기할때, 우리는 고령화와 독거노인, 은퇴후 불안이라는 현대 사회가 만들어낸 부분에 대한 사후처방을 논의한다. 예를 들면, 혼자 사는 노인의 삶의 조건을 혼자 살기에 좀 더 적합하게 만들어 주는 논의를 한다. 이 논의에서 인류학적 고민은 빠져있다. 전문적 고민을 해보지 않은 상태에서 그에 대한 급진적 대안은 무엇인지 말하기는 어렵지만, 복지의 한계에 대해서 좀 더 다른 각도로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일따름이다. 

미국에서는 공식적으로 원자력이 청정연료로 되어있다. 많은 나라에서 이 수사를 관철하려 노력하고 있다. 원자력에 대한 논의는 전형적으로 '원래그렇다' 고 주장하는 것에 대한 해결책으로 등장한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가 원래 그렇게 된 상황에서 이를 뒷받침 해줄 수 있는 에너지로 효율좋고 당장의 오염이 없는 원자력을 제시하는 것이다. 환경운동이, 혹은 녹생당들이 급진적일 수 밖에 없는 건, 그들이 자연상태를 고민하기 때문이다. 원래 인간은 정말 어땠을까. 대량으로 생산하지 않고 대량으로 소비하지 않던 시절 인간은 무엇을 얼만큼 필요로 했을까. 라는 논의는 급진적이다. 핵을 반대하는 이유로, 만의 하나가 만들어내는 무자비한 참사와 더불어 그것을 도대체 왜 필요로하는지 , 인간의 원래 그런 상태에 대한 비판이 동시에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의미에서 우리시대 반핵은 종합적 급진성을 보여준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급진성에 대한 고민에는 현실가능성의 비판적 제어가 끊임없이 필요하다. 급진적인 것은 기획이고, 현실은 실행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급진적 기획에 대해 현실성만을 내세우며, 상상 자체를 방해하는 행위가 참 흔하게 일어난다. 몽상적 급진주의와는 달리 이런 방해는 주류에서 드러난 곳에서 자행되기 때문에 위험하기도 하다.